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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밤을 묘사하는 무수한 문장들을 본다. 어둠은 빛을 빌려 대상을 무심히 드러낸다. 때론 적막 속에 이를 감추기도 한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감각하는 대상이란 단지 바라보는 이에 의해 있음과 없음 사이를 거닐 뿐이다. 

 

   낮은 빛 아래 대상의 전부를 내보인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둠이 부재하기에 전부를 볼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각으로부터의 발생하는 인식과 지각이 그 자체로 전부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은 재현을 통해 쉽게 무너진다. 만약 그것이 의심의 여지없는 견고한 실재라면, 우리의 재현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류민지의 회화는 본다는 것의 속성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함수에 대상을 대입함으로서 도출된 인상의 결과를 물리적 이미지로 재현한다. 다시 말해 그는 바라보기로부터 생성된 개별의 인상들을 기록하고 이를 다시금 회화로 재구성 한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보고 느낀 바로 그것이 곧 있음이다. 있음에 대한 믿음을 그자체로 평면 위에 물질화 시키는 작업은

시간의 자바라 속으로 이미 소멸된 과거 경험과 인상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있음을 부여한다. 이처럼 그의 회화에서 본다는 것은 과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선취하여 재현함으로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가의 기억에 보였던 경험은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경험으로서의 현시現時적 속성을 획득한다. 특히 류민지의 작업은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식의 작가 자신에 대한 지각을 포함한다. 퐁티에게 예술은 의미가 존재화되는 과정을 파악

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때 존재는 지각할 수 있는 세계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며 자기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에 의하면 미술가의 발화행위인 시각과 마음의 교차점으로부터 발생하는 바라보기는 작가로 하여금 보는 존재이자 동시에 보여지는 존재로 남게끔 한다. 따라서 이 때 작가의 의식은 세계의 광경speculum mundi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자신이 있는 세계 안에서,

세계의 일부로서 외부세계를 응시하는 관찰자가 된다. 이렇듯 퐁티의 시각과 존재에 대한 언어들은 류민지의 재현방식과 조형의 과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물리적 회화로 재생산된 자기기억의 기록들이 어떠한 형식의 이미지로 형성되는지에 관한 조형적 규칙들에 대하여 스스로 관찰자가 된다. 그의 작업은 세계 안에서 자신과 대상 사이를 선회하는 관찰행위를 통해 찰나의 기억들과 느낌에 존재감을 부여한다. 무작위한 인상들이 회화적 재현을 통해 다시금 독립적인 경험으로 남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에게 사적 사건들이 갖는 각 개별들의 주관성과 독립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 때 인상과

감각들의 재현이 어떻게 예술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그 유효성에 관한 질문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존 듀이John Dewey는 모든 정서들은 모두 하나의 극적 사건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듀이에게 정서는 개인적인 것이자 동시에 자기

밖에서 스스로를 결합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정서적인 것이란 대상과 결과들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정황의 일부여야만 한다. 류민지의 작업 또한 자신의 내적 세계에 그치지 않고 외부를 향한 지향과 의지를 보여준다. 독립적 경험으로서의 이미지는 재현을 통해 주관성과 동시에 인간 동류로서의 일반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의 회화적 전략은 평면 안의 공간성을 전제함으로서 이를 매개로 관객과 자신의 경험적 상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시간의 색, 공감각의 냄새 등이 엉켜 그가 만들어낸 공간에 들어찬다. 나무의 그림자와 이파리들의 거리감은 평면이 담을 수 있는 가능한의 입체감각을 은유한다. 낮과 밤, 점과 선, 면의 무수한 겹침과 명암이 생성하는 풍부한 공간감은 발생가능한 모든 차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작가의 실험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그림과 관객 사이, 수평으로 바라보게 되는 물리적 시점의 한계를 무력화시키며 태양과 나 사이에 머무는 나무 아래 수직의 시선을 새롭게 제시한다. 지난 경험과 그 때의 공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선의 방향성은 조형의 기록을 통해 현재 내가 있는 공간의 시선을 전복시킨다. 인상으로부터의 인상- 불명

으로부터의 불명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세계와 나 사이의 사건들을 분명하게 만든다. 작가와 관객이 각자 자신의 시간 스펙트럼을 길게 늘어놓고 그 중 한 부분을 잘라 필름을 겹치듯 포개는 바로 그 순간, 매개체로서 물리적으로 재현된 회화 이미지가

서로에게 보일 것이다. 

 

   이번 전시 《빛나는 것들》은 지난 2월에 열린 류민지 개인전 《Starry, Starry..》의 연장선에 있다. 이전 전시에서 그가 보여준 밤과 가로등의 인상들은 기억의 감관들로 다시 돌아가고, 이제 시간은 흘러 새로운 계절과 낮의 인상들로 발화되었다. 여기에서는 「Trees」 연작과 몇 점의 드로잉이 소개된다. 여느 거리를 걸으며 마주치는 가로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나무들은 그 색과

형태의 변화로 우리에게 살아있음을 알린다. 생명을 지닌 타자를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나의 존재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작가는 실존의 감각을 전달하던 그날의 기억을 빛의 덩어리들이 조합된 이미지를 통해 재현한다. 회화가 지닌 매체의 짓이김,

붓의 동선을 따라 드러나는 불분명의 형상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초점이 흐릿했던 어느 날의 거리 풍경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밤거리의 어둠 속 별처럼 빛나던 조명과 불빛에 대한 일상의 기록들을 담은 아트북 「Lightings」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미묘한 변화를 모은 「the air」에서는 캔버스 이면, 작가의 또 다른 매일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하늘과 밤의 샘플들이 관객의 감관을 건드린다.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하늘의 색이란 아주 가끔은 나의 그 어느 날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을까. 

 

  인상은 결국 하나의 찰나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안의 느낌으로만 남는다는 다소 고루한 이야기는 사실 언제나 예술의 가장

낭만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는 예술을 통해 모두가 한 번 쯤 바라볼 수 있었던 세계를 건드린다. 회화를 마주하는 순간, 근원이 불분명한 벅차오름에 숨이 가빠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작가와 나의 세계가 잠시 스쳐간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그곳에 서 있었을 것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운명론을 믿고 싶어진다. 문득 그의 회화가 바라

보는 누군가의 존재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존을 위하여 공감할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광경이 황홀하다. 나무 아래 멈추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당신의 인상이 궁금하다.                     

 

 

 

■천미림(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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